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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흉악 범죄는 본질적..
by dmdma;;; at 11/03 이왕 깔끔하게 마무리 .. by gkdk;; at 10/18 정작 저거 서울대에서는.. by walker at 10/03 멋진데? 목에 칼이 들어와.. by 긁적 at 09/28 바로 그 저열한 뒤집기와.. by Wizard King at 09/23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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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 '거세'한다고 나영이 없어질까?
'시사인' 109호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9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를 "평생 격리시키는 게 마땅하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정치권과 공직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더 높이자는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도는 시민과 그 대표자의 동의를 얻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 전반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제도는 개별적인 사건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건이 사회에 출현하게 된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나라 재상 병길이 사람들이 싸우고 길거리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은 그의 성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위정자로서 마음을 쓰기에는 지나치게 지엽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사회 전체에 광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적인 상황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소가 더위를 먹은 것을 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개별적 사태를 유도한 구조적 모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감정을 "배설"하는 선에서 모든 행동을 그쳐 세상을 편안하게 산다. 물론 잔혹한 방식으로 어린아이를 성추행한 범죄자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야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칠 경우 얼마 전의 경우에서처럼 이 '반인륜적인' 성폭행 가해자에게 걸맞는 '적절한 수위의 처벌'을 누가 더 잘 고안해내느냐 하는 이른바 "양형 경쟁"을 낳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등 상황의 본질을 호도하기 쉽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한 일간지에서는 "우리 사회는 화학적 거세에 대한 반대가 마치 범죄자 옹호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이 너무 쉽게 횡행한다."라는 한 인물의 주장을 전달하면서 "'나영이 사건' 범인 죽이고 싶다"를 메인 타이틀로 뽑음으로써 중고등학교 때 "양보절"이라는 표현 세 글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자랑하기도 했다.(링크) 사태의 원인을 고찰할 때뿐 아니라 그 해결책을 제시할 때도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사고가 요구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의외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는 아직 그런 능력이 부족한 쪽이 꽤 많은 것 같다. 최근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에서는 요즘 학생들이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는 경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보도하면서 일례로 한국 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고 적었다. 그런데 정작 이 기사의 수많은 독자는 '나는 한국 전쟁 언제 발발했고 누구와의 전쟁이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무식하지 않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참 무식하군.'하는 식으로 반응하였고 유사한 요지의 덧글에 추천을 몰아줌으로써 자신들의 독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링크) 사례가 한국 전쟁이 아니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정도였다면 몇 명이나 그렇게 자신감을 내보일 수 있었을까. 이번 조모 씨의 성폭행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본질 흐리기를 하나의 외연으로 보고 그 내연을 좀 더 깊이 살펴 본다면,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하는 감수성은 뛰어나지만 "옳게" 내지는 "바르게" 사고하는 방법이 부족한 이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다는 것, 그리고 사회를 꽤나 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감정적으로 "정당하게" 반응하는 데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실제로 벌어져 버린 사건을 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으로 여기고 다함께 "올바른 분노"와 "올바른 슬픔"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회. 그래서 신문을 치우면서는 마치 극장을 나서면서 모든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착각하여 결국 모두의 문제를 더 큰 괴물로 키워 버린 사회.(그리고 이 괴물은 관객 행세를 하면서 똑같이 극장에서 나와 올바르게 감정 표현을 한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 버린다.) - 그러나 이것을 순전히 개인의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운운하는 것은 그들과 동일한 우를 범하는 일이 되리라. 그러면 이 이상한 세상의 내연을 교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강박증을 택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사태의 본모습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겠다는 원칙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고민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견지해야 할 것이라는 당위만 마음에 새겨 놓고 일단은 끊임없이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김지하, 1970년. 한마디로 '×' 같아서 이 글을 쓴다. 김지하, 2009년.
http://www.nytimes.com/2009/09/08/opinion/08murakami.html?_r=1&scp=2&sq=murakami&st=cse
So why don’t people look happier? ……Deep down, we all know this. That’s why the gloomy expressions on the faces of Japanese on the street haven’t changed. But this does not mean we are on the verge of decline or decay. We’re merely experiencing the melancholy that any child goes through as adulthood approaches. 무라카미 류의 글이 뉴욕 타임즈에 실렸다고 어느 한겨레 기사에 떴길래 찾아봤다. 한참 된 글이네. 읽기도 힘들고 귀찮기도 해서 외신 보기는 때려 치웠는데, '재미'(?)를 놓칠 뻔했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53/377070.html
"웬만한 ‘애국’ 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이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열람이 가능한 사적 공간 - 물론 이것은 사건이 보여주는 성격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적 공간이 폭로한 개인의 이른바 '실체'
사람들은 보는 이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여기면서도 결국에는 무형의 독자가 존재한다고 상정해 놓고 나서 (이 역설!) 온라인 공간에 일기를 쓴다. 이때 노출 가능성에 열려 있는 이 사감을 보고 나서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괘씸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문제는 이 개인적인 감정에 관하여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공세를 할 권리까지도 그들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지지를 철회하고 상품을 구매하지 않고 속으로 기분 나빠하는 것을 넘어서서, 선언이 아니었던 개인적 감정의 표현이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집단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공정한 것일까? 이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답되어야 하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히브리 어로 '알다'는 '동침하다'와 동일한 표현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창세기』 4장 1절은 재미난 사례이다. (번역 비교) 제왕판(KJV)에서는 "아담은 그 아내 하와를 알았다(Adam knew Eve his wife)"라고 했다. "아, 이 사람이 내 아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같이 잤다는 소리다. 그래도 국역본에서는 "동침"이라는 표현으로 뜻을 명확하게 했다. 진짜 재미난 건 일본어 번역문이다. 신개역과 구어역, 신공동역 모두 그냥 "알았다(知った)"라고 했다. 그런데 신개역과 구어역에서 "사람(人)은 그 아내 에바를 알았다(人はその 妻 エバ を 知った)"라고 한 게 정말 특이하다. 일본어판에서 '아담'을 '사람'으로 옮긴 경우가 있었다니, 이건 처음 알았다. '에바'라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표기도 약간 그렇고.
한 가지 사례 더. 『누가복음』 1장 34절을 보자. (번역 비교) 역시 제왕판. 마리아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한 일이 없다는 것을 "남자를 알지 못한다(I know not a man)"라고 표현했다. 앞의 예와 다르게 어쩐 일인지 여섯 종류 가운데 네 종류가 "알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일본어의 신개역본과 신공동역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데(知りませんのに)"라고 했다.
이런 특집일수록 재미없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무척 재미있었다. 개그콘서트의 오랜 팬으로서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날이었다. 보고 싶었던 코너들이 잠깐 다시 등장한 것도 그렇고 떠난 코미디언들이 다시 얼굴을 보여준 것도 그렇고. 다시 보고 싶은 장면들이 이외에도 너무나도 많았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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